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 (문단 편집) == 결과 == 이 사건은 해밀턴의 목숨을 앗아간 동시에 버의 정치적 생명도 완전히 끝장내버렸는데 해밀턴이 남긴 말이나 기록을 보면 해밀턴 자신은 결투를 싫어했고[* 해밀턴의 '''큰 아들'''인 필립이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해밀턴과 버가 벌인 결투장은 그의 아들이 결투로 죽은 바로 그 자리였다. 죽은 아들은 장남 필립 해밀턴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가장 아끼던 아들이지만, 결투로 인해서 19세(1782~1801)의 나이로 사망했다. 게다가, 큰 딸인 안젤리카는 17살 나이로 오빠 죽음에 충격을 받아 미쳐버렸고 평생을 정신병으로 시달리다가 1857년 72살로 죽었으니 결투 때문에 아들과 딸을 잃은 셈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죽고난 다음해에 부인과 자신 둘다 40이 넘은 나이에 얻은 늦둥이 막내아들에게 다시 필립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런데 결투를 싫어한 것치고는 해밀턴은 은근히 결투를 많이 해본 인물이었다. 심지어 후에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먼로와도 결투를 벌인 적이 있다. 해밀턴은 약 10번의 결투를 해봤으며, 심지어 결투 직전까지 간 격렬한 언쟁은 수십개에 달할 정도였다.] 결투에 나간 것도 자기 자신이 명예를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며 버가 무사했던 것도 자신이 차마 버를 죽일 수 없어서 '''[[송양지인|일부러 맞지 않게 총을 쐈다]]'''[* 하늘을 향해 쐈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해밀턴의 총알은 버에게서 다소 떨어져있던 나무에 박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결투 전날에 쓴 글에서 '나는 종교적이고 실제적 이유에서 결투를 반대한다. 나는 첫발은 넘겨버리기로 결심했다(resolved to reserve and throw my first fire). 그리고 두번째도 유보할까 한다.' 그리고 총에 맞은 다음에도 '나는 일부러 첫발을 빗나가게 쏘려고 했다(I was going to intentionally fire my first shot to the side)라고 말했다.[* 사실은 해밀턴의 교활한 성격상 이것도 진심이 아니라 결투에서 질 경우를 대비해서 버를 '''완전히 보내버리기 위해''' 작정하고 준비한 멘트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에는 결투를 하더라도 일부러 빗맞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동의해놓고서 버가 '''실수로 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골반이라는 애매한 부위에 피격된 것도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당시 총기의 신뢰성이나 명중률은 그야말로 [[시망]]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다.] 이게 해밀턴의 일방적인 주장이든 사실이든 간에 그의 최후의 발언으로서 해밀턴은 '''모범적인 신사'''로 이미지가 남았다. 한편 버는 안좋은 이미지로 굳어졌고[* 미국 역사에서는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그냥 해밀턴을 결투에서 죽인 남자라고만 알려져 버린다.] 이례적으로 살인 혐의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버의 경우는 발언이 영 신중치 못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해밀턴이 일부러 총을 빗나가게 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버의 발언은 "'''사실이라면 멍청한 짓이군'''"(Contemptible, if true)이었다. 결투한 다음 날 오후에 버가 한 말은 "'''아침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해밀턴의 심장을 맞췄을 것이다.'''"였다. 문제는 당시의 미국 동북부 상류층은 사실상 고상한 부르주아 신사들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처럼 [[Badass]] [[해리 S. 트루먼|스타일의 나쁜 남자]]가 유행하던 시기라면 몰라도 그런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의 이런 언행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애초에 신사답게 처신하지 않을거라면 불한당마냥 불시에 기습해서 두드려 팰 것이지, 결투라는 격식은 뭐하러 갖춘단 말인가? [[제러미 벤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공리주의|공리주의]]의 창시자.]이 이야기한 "'''버는 살인자나 마찬가지다'''"(Burr is little better than a murderer)라는 표현은 당시의 여론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해밀턴을 정치적으로 용인하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분노로 다음 부통령직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버는 새로 미국 영토가 된 [[루이지애나]] 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대법관 [[존 마셜]]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마셜은 전임 대통령 애덤스가 후임 대통령 제퍼슨을 견제하려고 대법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였기에 이 판결도 제퍼슨을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자료들을 보면 버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나 정황은 없기 때문에 누명인 듯 하다.] 석방했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버는 미국을 떠나야 했다. 에런 버는 출소 후 제퍼슨의 계속되는 염장질에 지쳐 프랑스로 망명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영국 대신 미국을 치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에런 버가 개인의 원한을 해결하려고 프랑스 군대를 이용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탓에 에런 버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해도 계속 묵살했다.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결국 버는 망명 4년 만인 1812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하다 사망했다. 버는 빚이 있음에도 이름을 바꿔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변호사 일을 하면서 빚을 갚지 않자 빚쟁이들에게 고소당했고 패소했다. 그렇게 20년이나 돈을 갚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버는 1833년에 난데없이 19세 연하의 과부 엘리자 주멜(1775~1865)과 결혼했다. 엘리자 주멜은 남편 스테판이 죽은 지 1년 만에 재혼했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멜은 버의 토지 투기 손실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고 결혼 4개월 만에 그와 헤어졌다. 그런데 이혼 소송을 낸 주멜이 고용한 변호사는 바로 해밀턴의 아들인 알렉산더 해밀턴 주니어(1786~1875)였다(...).[* 해밀턴 주니어는 변호사와 부동산 사업으로 활동했는데 정치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거물 정치인들인 [[헨리 클레이]], [[존 칼훈]], [[제임스 먼로]]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을 포함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정치적 교류를 가졌으며 [[에이브러햄 링컨|링컨]]과도 만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돈도 없어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버는 결국 이혼했고 얼마 후 허름한 하숙집에서 죽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연방주의자들의 거두였던 해밀턴이 사망하고 [[존 애덤스]]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구심점이 사라져 미국사에서 연방주의자들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남북전쟁]]을 비롯해 이후로도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의 대립은 미국 역사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